2022. 11. 01
20:37
(게이트를 통과해 나가는 당신 뒤로 슬그머니 르웰린이 따라붙었다.) 아벨린 님 보러 가세요? 오늘은 급한 일로 차출되셔서 안 계실 거예요. 대신 제가 따라가도 괜찮죠? 차도 가져왔거든요.
(커다란 힐웬 보온병을 들어 보인 그가 순식간에 일행으로 끼어들더니 옆에서 속도를 맞추어 걷기 시작한다. 곧 낙엽 밟는 소리만 사락사락 이어졌다. 퍽 사근사근한 태도로 다가왔던 처음과는 달리 언덕까지 가는 내내 그는 조용하다. 꽤 기꺼운 일이다. 정보를 얻기 위해 아무에게나 발휘하는 사교성과는 달리 침묵과 무표정은 그가 믿을 수 있는 이들에게만 보이는 것이니까. 아발론의 조장급 기사들과는 침묵이 어색할 시기가 진즉 지나기도 했고.)
탑에 올라가실래요? 곧 아켈론이 바다에서 나올 시기거든요. (그럼 오히려 해안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던 당신은 곧 아발론이 완전히 정화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낸다. 그러고 보면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무기를 든 지도 꽤 오래된 듯하다. 깜빡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린 당신을 향해 르웰린이 손짓했다. 언젠가 그와 함께 오른 적 있던 탑을 이번에도 그를 따라 오른다. 탑의 꼭대기는 여전히 좀 서늘했다.)
저길 보세요. 아이들이 먼저 와 있네요. 아켈론을 좋아하거든요. (바닷가를 서성거리는 아이들 앞에 곧 거대한 거북이가 물살을 가르며 모습을 드러낸다. 느릿느릿 뭍으로 올라오는 아켈론을 바라보며 당신은 저도 모르게 난간을 꽉 쥐었다. 튀어나갈 뻔한 다리를 내리누르기 위해서다. 수없이 대적했던 상대를 아이들 앞에 두는 것이 불안한 마음이 불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는 이성과 충돌한다. 르웰린이 당신의 손등을 감싸며 나직한 목소리로 일렀다.)
괜찮습니다. 아이들에겐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주어져 있기도 하고요. 이 땅의 수호자로 지음 받은 피조물들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일이죠.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의 보호자로 따라온 어른들이 영 불안한 기색으로 아켈론을 힐끔대는 것이 보인다. 여차하면 아이들을 빼낼 준비가 된, 이따금 움찔거리는 손끝도. 거리가 멀지만 당신에게는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원하기만 한다면.)
어느 정도 나이가 찬 이들은 다 알고 있잖아요. 성지가 열린 직후의 아켈론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였는지. 그러니 오직 그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만이 돌아온 수호자들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아켈론은 온갖 바다 생물이 들러붙은 등껍질이 근질거린다는 듯 옆으로 누웠다. 조개며 산호의 딱딱한 외피가 모래바닥에 마구 짓눌리며 부서지는, 경쾌하기까지 한 소리가 난다. 오래 봉인되어 있던 이전과는 달리 자주 뭍을 오르내리는데도 뭐가 잔뜩 붙었다. 아마 몸에 감도는 정순한 신성력에 이끌린 생물들이 달라붙거나 등껍질 위로 낳은 알이 급속하게 생장하는 모양이다. 광물이 흡착된 것은 신성력이 바닷속 광물 일부에게 자석 같은 역할을 해서일 테고.)
자, 여기요.
(르웰린이 보온병 끈에 매단 철제 컵을 풀어 차를 내주었다.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지켜보는 그와는 달리 당신은 아켈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해 잔을 받는 것도 몇 번 헛손질해야만 했다. 아이들이 몰려들기 전에 등을 마저 긁으려는지 한번 일어났다가 반대쪽으로 다시 누우려던 거북이는, 모래사장에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아예 배를 까뒤집고 나동그라졌다. 아이들 특유의 높은 목소리로 아켈론이 '또' 넘어졌다며 아우성치는 말이 들려온다.)
(완전히 뒤집어진 거북이는 혼자서 일어날 수 없다. 아켈론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기사가 익숙한 기색으로 금속 지렛대를 가져왔다. 통짜 철로 만들어져 튼튼해 보이는 긴 막대다. 수량이 많다. 그를 필두로 장정 여럿이 달려들어 아켈론을 도로 뒤집어주었다. 아이들도 나름대로 고사리손을 보태려 했지만 깔리기라도 하면 위험하다는 이유로 반려된 모양이다. 멀찍이 물러나 지켜보다 아켈론이 똑바로 앉자마자 일제히 달려와 사다리를 걸쳐주길 기다리거나 그냥 기어올랐다.)
너무 걱정 마세요, 안전장치도 다 되어 있으니까요. (그 말대로 거주지에 조성된 제단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신성력이 사람들을 보호하고 아켈론을 제약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은 보았다. 넘어지기 직전 아켈론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기사와 어른들 쪽을 흘끗 향했다는 것을. 그리고 안다. 아켈론은 일반적인 거북이가 아니어서 뒤집어져도 혼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아마 이중에서는 당신만 알 것이다. 아발론에서 아켈론을 힘으로 뒤집을 수 있는 이는 당신과 톨비쉬 뿐이니까. 그러니 아켈론은... 일부러 넘어진 것이다. 자신이 지켜야 하는 이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그렇다고 안심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근데 조개 먹으려면 그거 해야하지 않나? 그거.
해감? 아니, 조개 껍데기가 다 부서졌는데 해감을 왜 해?
뻘이랑 모래가 껍데기에 있는 게 아니라 살에 있는 거 아냐? 조개가 입에 머금고 있는 거잖아. 아닌가?
조개에도 입이 있어?
입이 없으면 밥을 어떻게 먹어?
그런가... 그럼 그냥 바닷물에 빡빡 씻어 먹지, 뭐. 소금간도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