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9. 04

16:24

엄밀히 말하면 무신론은 신이 없다는 '믿음'이 아니라 인간에게 신은 필요 없다는 '선언'이에요. 무신론자들이 신과 관련된 무언가를 '믿을' 리가 없잖아요. 인간사는 오롯한 인간만의 것이고 그곳에 신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는 이들에게 신의 실존은 아무 의미가 없을 수밖에요. 종교 역시 신성한 무언가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 현상의 하나로서 분석과 연구의 대상으로 접근할 뿐이고요. 그런 의미에서 무신론의 다른 말은 인본주의라 할 수도 있겠네요. 아무래도 저의 신께서도 그것을 바라시는 듯하고... 그분께서는 저희에게 아무런 길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으시니까요.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여 길을 만들어나가길 바라시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차피 저희 같은 사람들은 신이 더 이상 필요없어진 세계에서도 최후의 최후까지 신을 모실 마지막 신관들일 테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지 싶기도 하고요.

하긴, 인간이 인간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뭐가 나쁘겠어요. 세상에는 여러 다양한 의견들이 필요한 법이죠. 모두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니까요. 물론... 사도로 빠지는 경우만 제외하면요. 이 경우에는 인간우월주의겠네요. 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자연이나 다른 종을 착취할 권리라도 받은 듯 행동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혹은 인간만이 신의 특별한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는 유일한 종이라고 생각하거나. 신을 믿든 부정하든 일정 비율로 항상 나타나는 사람들인데... 뭐, 어느 분야에나 정도와 사도가 있는 법이니까요. 사유와 고찰만으로는 이들을 막을 수 없죠. 행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네? ...왜 사제면서 무신론에 대해 아는 거냐고요? 그야 사제니까 아는 거죠. 식물학자가 어디 식물만 연구하던가요. 기후나 토양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그러잖아요. 이 이야기에선 크게 중요한 부분도 아니고요.

태생이 정결한 것은 세속에 물들기도 그만큼 쉬운 법이죠. 각 종교에는 어두운 부분과 그늘이 있는 법이고 그 그늘이 때로는 세속의 것보다 짙고 깊기도 해요. 밀레시안 님이 오신 세계의 종교들도 그런 면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그 세계의 무신론자들은, 음... 종교가 하는 것은 구휼이나 국가가 하는 것은 복지이기에 사람의 안위를 살피는 것은 국가의 영역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던데요. 복지는 국가가, 정신적인 위안은 그것을 담당하는 힐러가 해야 한다고요. 그렇게 되면 정말 종교가 필요없어지긴 하겠어요. 구휼과 복지의 차이는 저도 아직 완전히 이해하긴 어렵지만... 위에서 아래로 베푸는 것과 동등한 위치에서 손을 내미는 것 정도의 차이일까요? 하긴, 사제들이 마치 자신이 신인 양 거들먹거리는 일도 있으니까요. 게다가 종교가 신의 이름을 걸고 어려운 이들에게 선행을 베풀면서 그 대가로 귀의할 것을 요구하거나 죽음을 앞두거나 상황이 어려워 마음이 약해진 틈을 파고들어 포교하는 일까지 있는 마당이니... 그간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에린의 종교라 해서 아주 다른 것은 아니겠죠. 처음에는 국가와 종교가 짐을 나눠 지면 서로에게 좋은 것 아닌가 생각했는데, 그런 일들이 만연하다면 이런 주장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네요.

게다가 그 세계의 종교들은 교단을 막론하고 회당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일은 대다수 여성이 하면서 그 결과로 신문에 나거나 명예를 얻는 건 대부분 남성이라는 얘기도 들었어요. 이를테면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료로 식사를 제공할 때, 식사를 준비하고 배식하고 설거지하는 이들은 전부 여성이지만 그 공은 회당의 대표자인 남성에게 돌아가는 식이라고요. 그런 식이라면 종교에 대한 회의감 역시 이해 못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종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외면당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저희도 밀레시안 님께 개입할 수 없다는 말씀을 자주 드렸었고요. 그런 표정 하지 마세요. 사실인 걸요. 잘못은 잘못이고 인정하지 않으면 개선도 발전도 없는 법이잖아요?

2020. 09. 06

16:32

고해성사라... 저희가 모두 사제이기는 하지만, 가능한 한 서로에게는 고해를 하지 않아요. 가뜩이나 좁고 폐쇄적인 집단에서 서로 비밀을 공유하게 되면 남는 건 파국 뿐이니까요. 일차적으로 기도를 통해 해결하는 것을 권장하지만,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상급자와의 단독 면담을 요청할 수 있어요. 위로 올라갈수록 입이 무거워져야 하는 이유 중 하나죠. 저도 어느새 말하는 것보다는 듣는 게 익숙해졌네요.

2020. 09. 27

12:54